[스크랩] 티벳 포탈라궁 사원(티벳 라싸)

2009. 2. 10. 15:26티벳과 영어 금강경

 

 

 

 

 

사원 안 라마승

 

사원 코라길

 

 

 

포탈라궁 사원 (달라이 라마) 


중국 서장(西藏)자치구 티벳의 첫도시 라싸는 ‘태양의 도시’라고 한다. 해발 3,700m의 고지이다. 세계 10대 건축물로 13층에 높이 117m,폭은 110m,동· 서의 길이가 360m나 된다. 포탈라궁 건물 정상은 황금을 입힌 전통양식의 구리기와 지붕 5개로 이루어졌다. 넓이가 36만㎡에 이르는 궁은 남쪽 출입구를 제외하고 성벽과 담으로 둘러싸여 바깥세상과 차단 되어있다. 포탈라궁은 우리나라 신라시대인 7세기에 건설됐다. 티벳의 역사와 티벳인들의 기원을 담은 성전이자 궁궐이다. 인도불교가 티벳에 들어온 것은 5세기무렵이다. 인도불교는 티벳 토속의 원시무속 종교인 본교(本敎)와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인 후 라마불교로 자리잡았다. 라마불교의 일인자는 달라이 라마이다. 포탈라궁 역시 달라이 라마의 거처이자 라마불교의 사원이 됐다. 포탈라란 이름은 본래 ‘관음의 성지’란 뜻이다. 이 궁은 티벳 각부족과 지역을 통일한 강력한 티벳왕국(吐蕃)을 세운 송첸캄보가 631년에 지었다. 처음 1천간 규모로 지었는데 당시 당나라 황실의 문성공주를 아내로 맞기 위해 이 궁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곧 포탈라궁은 세속의 티벳왕궁이었다. 그러나 각 부족과 지방 분열로 왕권의 공백이 생기면서 세속권력까지 장악 한 라마불교의 지도자가 궁을 접수했다. 그뒤 왕궁이란 기능말고도 사원 기능 을 추가하고 산속 드레풍사원(철봉사)에 살던 달라이 라마가 1645년에 들어왔다. 오랜 분열과 내전 등으로 폐허화한 포탈라를 접수한 달라이 라마 5세는 궁의 성벽과 성루등 을 재건했다. 달라이 라마 5세가 궁을 재개한 것은 정교합일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신권(神權) 뿐아니라 세속권력마저도 장악한 달라이 라마는 1690년 오늘날 사원 으로 쓰는 홍궁을 따로 착공 1693년 완성했다. 그리고 오늘날 라마교의 상징 인 5개의 금정을 추가로 세웠다. 궁의 외벽은 흰색과 붉은색을 칠해 백궁과 홍궁을 구분한다. 백궁은 달라이 라마가 사람을 만나고 정무를 돌보고 생활하는 공간으로 쓰이고 홍궁은 지금까지 사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궁에는 대불만도 1천구가 봉안됐다. 작은 불상까지 합하면 수만점이 넘 을 것이란 추산이다. 포탈라궁의 부처상은 화려하다. 달라이 라마의 소상을 모신 각(閣)이 불상을 모신 불전(佛殿)에 비해 훨씬 많다. 이는 라마 불교의 특색이기도 하다. 부처가 달라이 라마로 환생한 것이라고 믿는 환생설(還生說)을 바탕으로 달라이 라마를 생불(生佛)로 추앙하고 있는 것이다. 홍궁사원의 중카바와 역대 달라이 라마 소상들은 한결같이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쓰고있다. 중카바는 역대 달라이 라마의 뿌리로 달라이 라마 2세가 그의 직계 제자다. 지금 미국에 망명중인 달라이 라마 14세를 비롯한 모든 달라이 라마들이 그의 법통을 이은 후계자이다. 중카바는 14세기에 라마교를 개혁하고 이른바 격로파(格魯派)를 창시한 인물이다. 라마교를 오늘의 모습으로 완성한 사람이다. 중카바가 이끈 격로파의 승려들은 노란색 고깔모자를 썼다고 한다. 그래서 황모파(黃帽派)또는 황교파라고 하는 이들은 라마교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이들 중카바와 역대 달라이 라마들의 지위가 부처에 버금갈정도로 신격화한것도 격로파 세력이다.  포탈라는 산자와 죽은자가 함께하는 궁전이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는 죽어서도 생전에 살던 포탈라를 떠나지 않았다. 이들 산자와 죽은자를 같이 경배하기 위한 순례객의 발길이 이어진다. 티벳은 물론 사천성과 네팔,스리랑카 등에서 온 라마불교 신도들로 붐비는 포탈라궁에서 달라이 라마가 앉았던 의자에 입맞추는 순례객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달라이 라마가 살아서 쓰는 궁전은 백궁이다. 백궁은 ‘최상의 행복궁’이 나 ‘영원한 생명의 궁’ 따위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백궁 가장 높은 층인 ‘영원한 생명의 궁’에서만 잠을 잤다. 포탈라에는 다른 불교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영탑전(靈塔殿)이 있다. 영탑은 달라이 라마의 시신을 모신 탑인데 전각(殿閣)안에 봉안되었다. 화장한뒤 뼈만 모아 넣어두거나 약품처리한 시신을 그대로 넣어두는 경우도 있다. 홍궁 맨 뒤쪽 아래층의 영탑전에는 5세와 7∼9세, 13세 등 다섯 달라이 라마의 영탑이 자리하고 있다. 그중에 5세와 13세의 영탑은 화려하다. 5세 달라이 라마의 영탑은 죽은지 5년뒤인 1690년에 조성되었다. 영탑은 기단에 호리병을 올려놓은 것 같은 모양이다. 14.85m에 이르는 탑신은 동과 은으로 만들고 황금칠을 올렸다. 주옥과 산호 따위의 보석을 군데군데 박아놓았다. 은이 1만량 황금이 11만9천량이 들어갔다는 기록이 있다. 13세의 영탑은 1934년에 완성되었다. 영탑전은 홍궁 다른 공간에도 하나가 더 있다. 홍궁 후문 서편 강당 뒤쪽이다. 달라이 라마 5세와 10세, 11세와 12세의 영탑이 두 방에 봉안 되었다. 그런데 영탑전과 이웃한 서편 강당에서는 1959년 까지만해도 달라이 라마의 음성이 들렸다. 그 음성은 바로 포탈라에 사는 수백명 승려들에게 들려 준 달라이 라마 14세의 설법이다.  59년 이후 어떤 행사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달라이 라마는 없지만 라마승과 순례자들이 켜놓은 촛불은 그냥 타고 있다. 달라이 라마 14세가 망명한 1959년 이후 변화한 공간은 또 있다. 백궁의 동쪽 정원이다. 이 정원에는 절기가 바뀔 때마다 승려와 티벳 사람들이 천여명씩이나 몰려들었다. 달라이 라마가 의례히 백궁 발코니로 모습을 드러냈다. 종교의식을 베풀고나서 민속놀이를 즐기는 군중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그 정원이 지금은 빈뜰로 남아있다. 백궁과 홍궁을 합뜨려 포탈라는 1천개가 넘는 방을 갖추었다. 이 가운데 일반에게 공개하는 방은 30여개 뿐이다. 동쪽 정원에서 3층 정도의 계단을 올라가면 달라이 라마 집무실이 있는데 비공개 공간이다. 달라이 라마가 정무(政務)와 종무(宗務)를 본 집무실은 명상의 공간이기도 했다. 백궁의 복도와 회랑에는 티벳사와 티벳불교사,역대 달라이 라마의 일생을 담은 벽화들이 가득하다. 방마다에는 달라이 라마들이 앉았던 자리를 보존한 가운데 달라이 라마들의 소상을 세워두었다. 한쪽 벽에는 닫 집을 만들어 불상을 모셨다. 또 다른 벽에는 경전함을 덧대어 천정 꼭대기 까지를 불경으로 채웠다. 이들 경전은 티벳어, 몽골어, 만주어 등 소수민족 언어 로 되어있다. 어마어마한 장서들은 라마불교권 학승(學僧)들을 포탈라로 불러들인다. 포탈라를 세계적 불상박물관 또는 세계적 불교박물관이라 부른다. 그것은 티벳불교가 정치를 손에 쥔 종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홍궁에는 여러 부처 이름을 딴 방도 곳곳에 널려있다. 미륵 보살전이나 천수관음보살전,   관음보살전과 만다라전이 그것이다. 이들 불전(佛殿)에서는 야크기름을 태우는 순례자들의 참배가 계속된다. 그 많은 부처의 상(像)중에서도 티벳불교의 핵심은 관세음보살상이다. 관세음보살이 티벳인들 신심속에 자리잡은 연유는 상게 감쵸(1653∼170 5년)로 거슬러 올라간다. 달라이 라마 5세의 제자인 그는 당시 생존한 달라이 라마의 원수라는 정당성을 부여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문수리근본의궤(文洙利根本儀軌)’의 예언을 믿었다.티벳은 본래 관음보살 교화(敎化)의 땅이 라는 그 예언에 따라 관음보살은 티벳불교를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관음보살전 규모는 의외로 적다. 3구의 관음보살상 가운데 한구는 키가 1m 남짓한데 7세기쯤에 만들었다. 금물을 입힌 단향목(檀香木)불상이다. 티벳인들은 이 보살상은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 저절로 관세음 보살 모양을 하게 된것으로 믿고 있다

 

 

티벳불교 (라마교)


흔히 라마교(Lamaism) 라고한다. 티벳불교의 역사는 7세기때, 손첸캄포(?-649) 라는 뛰어난 왕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당(唐)과 네팔 출신의 칩주엔프(Chif-Zuenf)와 당나라 출신의 웬정(Wencheng) 왕비가 처음 들여온 중국계와 인도계 불교를 수용해 주술(呪術)을 중시하는 티벳고유의 신앙인 뵌(Boen)교와 혼합한 형태의 불교를 주창해, 티벳불교를 창시했다. 또한, 손첸캄포 왕은 티벳불교의 중심인 라싸를 창설했고 수많은 불경번역과 티벳의 공식문자를 창제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8세기 중엽 인도의 샨티락시타 (Santi-raksita)와 파드마 삼바바가 밀교(密敎)를 전해, 이후 티벳불교의 근본은 밀교(密敎)가 됐다. 842년, 란마르다 왕은 티벳불교를 폐교시키고 민족의 종교인 본교를 부흥시켜 수난을 겪게 되지만 티벳불교는 2백년뒤인 1042년, 인도에서 초빙된 아티샤(Atisa)에 의해 다시 개혁돼, 이 때부터 밀교의 성격이 더욱 강해졌다. 그후 중원의 패자(覇者), 원(元)나라에 전파돼 국교가 됐고, 이후 몽고와 명(明), 청(淸)나라에서 융성했는데, 그 영향으로 티벳불교는 몽고, 만주와 중국, 러시아, 북인도에 퍼졌고, 한국 불교에도 라마교의 영향을 적지 않게 미쳤다. 이 오랜 발전속에서 Nyingma파, Sa-kya파 등 많은 분파를 형성해왔었다. 14세기 말 까지 티벳불교는 권력과 결탁해 극도로 퇴폐해져 타락한 밀교행위와 주술만을 하게 되는데, 총카파(Tsong-ka-pa, 宗喀巴)가 엄격한 계율을 도입하고 대승교학을 기초로하는 일대 개혁을 벌였다. 이때 Tsong-ka-pa는 노란모자(Dge-lugs, 黃帽) 파를 만들어 이전의 붉은모자(赤帽) 파와 구분했는데, Tsong-ka-pa의 제자 가운데 겐둔그룹(Ge'dun-grub; 1391-1495)이 초대 딜라이 라마 (Dalai Lama)가 돼 현재까지 14대에 이르고 있다. 딜라이라마는 티베트불교의 가장 대표적 종파인 겔루크파[黃帽派]의 수장(首長)인 법왕(法王)의 호칭이다. 라마(Lama)는 덕이 높은 스승을 의미한다. 라마는 환생에 의한 계승을 원칙으로하기 때문에 어느 마을이나 환생 라마가 있다는 것은 중요하게 여겨져왔고, 그런 이유로 환생라마는 수가 많이 늘어났다. 라마앞에 붙는 접두어는 큰 라마에 대한 존칭인데, 최고 지위인 '딜라이 라마'의 딜라이(Dalai)는 몽고어로 바다를 뜻한다. 티벳 사람은 자신의 나라를 관음(觀音)의 정토(淨土)라고 생각하는데, 그 통치자인 딜라이 라마를 관음의 화신(化身)으로 믿고 있다. 티벳불교는 인도 대승불교에서 고도로 발달한 교리와 밀교수행의 최종단계를 계승한 것으로 인도의 불교가 멸망한 뒤에도 독자적인 발전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방대한 '티벳 대장경'과 티벳인이 남긴 저작에 있어서 티벳불교는 불교의 막대한 보고(寶庫)일 뿐만 아니라 엄청난 티벳불교 유적과 미술품 그리고 음악이 어우러져 인류 최대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출처 : 성화사랑
글쓴이 : bae sung so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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