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기자조선은 실존 했었다
2008. 6. 25. 11:31ㆍ한민족고대사
문화대혁명이 대륙을 강타하고 있던 1973년 3월.
분서갱유처럼 역사와 학문이 산산이 파괴되던 그 잔인했던 대륙의 동북쪽이었다.
한 농부가 랴오닝(遼寧)성 카줘(喀左)현 성 소재지인 다청쯔(大城子)에서
남쪽으로 15㎞ 떨어진 다링허(대릉하·大凌河) 유역 남안의 작은 구릉, 즉 구산(孤山) 베이둥(北洞)을 찾았다.
채석작업을 벌이던 농부는 깜짝 놀랐다.
표면에서 불과 30㎝ 밑에서 모두 6점의 은(상)나라 시대 청동기가 질서정연하게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표면에서 불과 30㎝ 밑에서 모두 6점의 은(상)나라 시대 청동기가 질서정연하게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청동 항아리 1점과, 청동제 술그릇(뢰) 5점이었는데, 모두 주둥이가 위를 향해 있었다. 희한했다.
제2호 청동 술그릇의 주둥이 안에 이상한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 고죽, 기후 명 청동기
■ 고죽, 기후 명 청동기
6자였다.
그런데 6자 가운데 3, 4번째 글자인 ‘고죽’ 두 자는 1122년 송나라 휘종이 출간한 ‘박고도록(博古圖錄)’과
상하이 박물관 소장 청동기 부록(1964년)’에 수록된 은(상) 청동기 명문 중에서도 나온 바로 그 글자였다.
바로 고죽(孤竹)이란 글자였다.
항아리의 무늬와 형태는 갑골이 쏟아진 안양 인쉬(殷墟) 유적에서 나온 은(상) 나라 말기의 청동 술그릇과 같았다.
같은 해 5월, 이 교장갱(교藏坑·물건을 임시로 묻어둔 구덩이)을 정리하던 조사단은 불과 3.5 옆에서 또하나의 구덩이를 확인했다.
같은 해 5월, 이 교장갱(교藏坑·물건을 임시로 묻어둔 구덩이)을 정리하던 조사단은 불과 3.5 옆에서 또하나의 구덩이를 확인했다.
지표 밑 50㎝에서 은말주초 청동기 6점을 발견한 것이다.
청동기 6점은 장방형의 교장갱 안에 세 줄로 배열됐다. 솥(鼎), 술그릇(뢰), 물 따르는 그릇(帶嘴鉢形器) 등이
하나의 세트로 일정한 규율을 갖추고 있었다.
“제2호 교장갱 출토품 가운데는 방정(方鼎·사각형 솥)이 가장 주목을 끌었어요.
“제2호 교장갱 출토품 가운데는 방정(方鼎·사각형 솥)이 가장 주목을 끌었어요.
높이 52㎝, 입지름 30.6×40.7㎝, 다리 높이 19.6㎝, 무게 31㎏였는데 굉장히 아름답고
전형적인 은(상)나라 말기의 방정이었지.”(이형구 교수)
방정의 형태와 무늬는 역시 인쉬 부호(婦好)묘와 인쉬 허우자좡(侯家莊) 대묘에서 출토된 대형 청동솥과 같았다.
방정의 형태와 무늬는 역시 인쉬 부호(婦好)묘와 인쉬 허우자좡(侯家莊) 대묘에서 출토된 대형 청동솥과 같았다.
은(상)나라 말기의 것이었다. 그런데 이 방정의 북쪽 내벽에 4행 24자의 명문이, 바닥 중심에도 4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문제의 명문은 내부 바닥 것인데, ‘(箕侯)’로 읽을 수 있는 명문이었다.
문제의 명문은 내부 바닥 것인데, ‘(箕侯)’로 읽을 수 있는 명문이었다.
보고자들은 명문에서 보이는 ‘고죽’과 ‘기후’를 은나라 북방에 자리잡은 2개의
상린제후국(相隣諸侯國·인접해 있던 제후국)이라고 추정했다.
자세한것은 여기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803141703085&code=900308
출처 : 1만2000천 봉우리 월출산 사는 시골 촌부
글쓴이 : 1만2천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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